도톰한 빨간 니트에 웃음의 세월을 따라 옅게 패인 주름, 삐죽한 곳 하나 없이 잘 정리된 머리. 김영신 님의 첫 모습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의 전형이었지만 딱 하나가 달랐다. 어깨에 둘러멘 커다란 백팩. 평소 무거운 것을 자주 들고다니는지 백팩은 등 전체를 덮을 만큼 컸고, 끈도 두꺼웠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도 오늘 내야 하는 프로젝트는 제출하고 왔습니다.”
그는 은퇴 후 매일 9시부터 4시까지 코딩 수업을 들으러 등교를 한다고 했다. 은퇴하고 나면 대부분 산으로 바다로 그동안 못누린 평안을 쟁취한다던데 코딩 공부라니, 신기했다.
“에디터 님은 웰빙을 살고 있죠? 전 웰다잉이에요. 죽어가고 있죠.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뭘 배우거나 나아졌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하거든요. 그게 제 평안이죠 뭐.”
어쩌다 코딩의 곁에서 웰다잉의 삶을 보내게 된 걸까. 김영신 님이 코딩의 세계에 입문하기까지 지나온 꽤나 긴 세월을 찬찬히 들어봤다.
은퇴 직전까지 어떤 일을 했나.
기상청에서 일을 시작해 국장, 부산지방 기상청장, APEC 기후센터 전문위원을 지냈다. 이렇게 행정 분야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다가 2015년에 퇴직했다.
커리어의 정점까지 찍었다.
요즘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이리 오래 일할 수 있겠냐 싶겠지만, 일 하는 내내 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익을 위한다는 자부심 덕분인 것 같다. 법에 맞지 않는 것은 거절하고 오직 법에 따라서만 일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높은 직책까지 올라가 있더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퇴직했다.
은퇴하고 나서 어떤 삶을 시작했나.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기상 관련 데이터는 방대한데 일기 예보에만 주로 쓰이는 게 안타깝더라. 공개된 기상 관련 데이터로 날씨 경영에 활용하는 ‘단비’라는 회사를 차렸다. 기상 전문가와 데이터 전문가도 19명이나 불러 모았다.
날씨는 우리 일상 뿐만 아니라 기업과 같은 단체에도 영향을 많이 미치지 않나. 이들의 이득이나 손해와 직결되는 날씨 정보를 맞춤형으로 제공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요양원은 산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그 동네의 산사태 정보를 따로 받아볼 수 있다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거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공적으로만 쓰였던 날씨 정보를 민간에 좀 더 활용하고 싶었다.
보통은 은퇴하고 나서는 여행도 다니고 좀 쉬지 않나.
공직에서 근무하다 퇴직하고 나니 사회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놀면 뭐하나. 그 혜택을 사회에 보답하는 활동들을 하고 싶었다. 와이프가 서운해 하긴 하지만, 그만큼 주말에 잘 하고 있다.(웃음)
사회에 보답하기 위해 하는 활동들이 또 있나.
틈날 때마다 지식iN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27,000개 정도 답변을 했고 전체 순위는 900위 권이다. 원래 전공 분야를 살려 날씨, 환경, 경영 쪽의 답변을 주로 한다.
‘보상도 없는 이걸 왜 이리 열심히하냐’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후 정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코딩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IT 세상이지 않나. 데이터 관련 사업에서 대표이자 PM 역할을 하고 있는데 코딩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비지원으로 자바-사물인터넷 과정을 수강했다. 하지만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라. 영어를 빠르게 입력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잘 정리되어 있는 교재가 있다면 혼자서 복습이라도 할 텐데 교재도 따로 없었다. 4개월을 버티다 장렬하게 그만뒀다.
큰 결심을 하고 시작했을 텐데 그만두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게다가 그 국비지원 강의는 몇 군데 탈락하고 나서 붙은 곳이었다. ‘파이썬이 무엇이냐’ ‘자바가 무엇이냐’ 등의 간단한 질문을 묻는 이론 시험에서 매번 낙방했었다. 다행히 마지막에 공부를 조금 해서 겨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포기하려니 아쉽고 아깝고 그러더라.
마음만큼 머리가 팽팽 돌면 좋았을 텐데. 어렵다는 사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변하지 않았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 코딩을 어떻게 다시 시작했나.
우연히 카카오톡 광고로 알게 된 스파르타코딩클럽의 강의 덕분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강사들이 ‘사기꾼’ 같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잘 가르치더라. 이전 강의를 들을 때는 길을 헤매는 느낌이었는데 스파르타코딩클럽에서는 안내자처럼 중간중간 길을 딱 알려줬다.
솔직히 나는 나이도 많으니 코딩을 배울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비정상 같은 일을 스파르타코딩클럽의 강사들이 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연달아 강의를 6개나 수강하고 지금도 꾸준히 코딩 공부를 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나.
서울시에서 하는 6개월 과정의 IoT 융합 교육을 듣고 있다. 오늘도 방금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고 왔다.
어떤 프로젝트를 끝냈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날씨 경영 우수기업’을 매년 선정하는데, 신청 절차가 오프라인으로 진행돼 매우 오래 걸린다. 더 많은 기업이 우수기업으로 선정되면 날씨 경영의 중요성도 더 알려지겠다는 생각에 이 절차를 간소화하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중이다.
신청서를 플랫폼에 넣으면 평가자들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다. 데이터 전문가, 기상 전문가가 모두 필요한 영역인데 이렇게 플랫폼이 있으면 쉽고 빠르게 심사가 진행될 수 있다.
몇 년 전 코딩이 어려워서 포기했던 때와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그렇다. 여전히 어렵긴 한데 이전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번에는 나보다 10살 이상 많은 80대 할아버지도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라는 핑계도 안 통한다. 잘 하진 못하지만 쫓아가고는 있다.
이번에도 어려웠다면 코딩을 아예 포기했을까.
포기는 안 했을 거다. 나도 에디터 님 같이 한창일 때는 겁먹고 포기하는 일도 많았다. 근데 나이가 드니 삶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더라. 꼭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간 것만큼은 이득이라 생각하기에 코딩도 아마 계속 했을 것 같다.
은퇴 이후 코딩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했다. 만족하나.
은퇴하기 전 주변에서 자주 들은 얘기가 있다. 이공계 전공자는 은퇴하고 나서 할 일이 많지만 우리같은 인문계는 할 일이 없다고.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자. 은퇴는 원래 할 일이 없어서 좋은 것 아닌가. 오히려 내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마음도 생긴다. 내가 코딩에 도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것도 그중 하나다.
요즘 세상에 코딩은 물이고 불이다. 은퇴를 하면 세상과 멀어질까봐 겁이 났는데 코딩을 배우니 세상과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더라. 아마 산이나 바다를 쫓아다녔다면 느끼지 못했을 거다. 코딩을 하게 해 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그럼 은퇴한 주변 사람에게 코딩을 추천하고 싶나.
솔직히 다 재밌어할 것 같진 않다. 다만 코딩 자체가 치매 예방약이 된다는 사실은 꼭 알려주고 싶다.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하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이 인터뷰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은 웰빙의 날들을 보내고 있겠지만, 난 웰다잉의 삶을 살고 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보다 오늘을 비교했을 때 무언가라도 나아졌다, 그것만큼 대단한 일이 없다. 난 이걸로 충분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선생님에게 ‘큰일’은 무엇인가.
코딩. 내가 직접 배워보니 코딩은 1의 노력을 넣으면 1000의 결과가 나오는 마법이더라. 그런데 내가 그 마법을 부리고 있지 않나. 마법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회사 일에 치일 때면 누구나 한번쯤 ‘은퇴’라는 무용한 꿈을 떠올린다. 은퇴한 삶은 어떨까. 자유로워진 나를 이 배경 저 배경 속에 넣어보다 결국 상상뿐임을 깨닫고 이내 곧 일로 돌아오길 반복.
그런데 정말 은퇴한 삶은 어떨까. 천진난만한 질문에 김영신 님은 조금은 어려운 답을 내놨다. 세상과 멀어짐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 활력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코딩’은 그 노력의 일환이라고.
청춘의 삶들은 적성을 찾아 헤매고 그중에서도 잘하는 일을 고르기 위해 고심하지만, 김영신 님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치 않다. “꼭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냥 하는 만큼만 하는 거죠. 이 나이에 가슴이 뜨거워지기가 어디 쉽나요. 전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가슴이 뜨거워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그는 오늘도 노트북 앞에서 코드를 헤매고 있다.
CREDIT | 박영경 팀스파르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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